[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97話’

일본인의 조선철도 이야기

매일건설신문 | 기사입력 2022/08/21 [14:37]

[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97話’

일본인의 조선철도 이야기

매일건설신문 | 입력 : 2022/08/21 [14:37]

▲ 경인철도 개통 시 구경꾼들 모습                           © 매일건설신문

 

경인철도 초창기부터 철도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던 일본인 에구치 칸치(江口寬治 : 1899년 11월 경인철도 입사, 1907년 6월 철도관리국 서기, 1916년 6월 종사원양성소 교사. 1917년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운수과, 1918년 8월 경리과, 1927년 철도국 서무과 근무, 퇴직 후 조선철도협회 상무이사)가 퇴직한 후 쓴 ‘철도 회고록’(1936년 ’조선철도 야화‘로 출간)에 소개된 글 중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경인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총지배인은 한강 강변에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었지만 한국 사람의 반일 감정 때문에 반대의견이 많아 포기했으며, 철도가 처음 개통되자 정거장에는 승객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일본 돈과 한국 돈의 가치가 달라 월급도 한화로 얼마, 일화로 얼마 등 차별되어 계산이 복잡하였으며, 기차표를 살 때 엽전을 한 문, 두 문하며 세는 동안 열차가 출발하면 손을 흔들며 쫓아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는 내용에서 당시 한국인의 반일 감정과 차별대우 등이 엿보여진다.

 

1904년 초 이토(이토히로부미)공이 전권대사로 내한하여 한가한 하루 사냥을 즐기려고 수원행 열차에 편승하여 안양에서 내려 관악산에 갔는데 조선인 사냥꾼의 협조로 많은 포획물을 얻은 후 안양역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상경하면서 안양~시흥 간을 지날 때 창밖에서 날아온 돌이 창문을 깨트리고 날라와 이토공 얼굴에 선혈이 낭자하여, 차내가 소란해졌으며, 함께 간 수원역장의 응급조치에도 지혈이 되지 않아 군의(軍醫)를 부르도록 영등포역에 연락하니, 남대문이 폭도에 피습되어 화재가 발생하였다는 보고에 더 소란해졌다.

 

영등포역에 도착하여 확인한 바 화재는 남대문 근처 가정집의 화재였고, 투석한 범인은 체포되었지만 불온한 사람이 아니고, 자주 있는 조선 악동들의 투석행위로 밝혀졌다 하여 당시의 불안한 사회상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국에 이르러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 해군의 결전이 목전에 다다랐을 때 전쟁이 시작된 사실을 마산역 전신원이 청취한 후, 재빠르게 군용철도선 시발역인 삼랑진역에 알리자, 삼랑진역 전신원은 수신 즉시 개전 사실을 전 조선에 신속하게 전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후에 구포역장으로 퇴직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열차 운행의 시작은 1899년 9월 18일이었지만 열차에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의 ‘철도 회고록(후에 ‘조선철도야화’라는 이름으로 출간)’에 의하면 1908년 4월에 부산~신의주 간 최초로 운행될 직통열차의 이름을 철도국 간부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협의한 결과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며 시작된 연호(年號)인 ‘융희(隆熙)’를 열차 이름으로 결정하여, 1908년 4월 1일 밤 8시 부산역 출발 신의주역행 급행열차를 ‘융(隆)호’로 다음 날 아침 7시에 신의주역 출발 부산역행 급행열차를 ‘희(熙)호’로 명명한 것이 최초의 열차 이름이었으며,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오늘날은 ‘히카리호’열차나 ‘노조미호’열차가 달리고 있지만 ‘융희호’는 그 당시의 걸작이며, 같은 날 식당차의 운전과 부산역이 개업하였고, 시간도 조선의 표준시로 개정하여, 내지(內地 : 일본)와 30분의 시차가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98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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