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과 ‘순살아파트’가 건설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사기꾼들에게 ‘왕’이라는 이름을 덜컥 붙여줬고, 수백 명이 한 곳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는 건물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흐물거리는 ‘순살’을 갖다댔다. 이 두 단어는 건설인들을 모욕하고 지난 수십 년간의 건설산업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가혹하고 무섭다.
전세사기로 수많은 세입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해 적발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를 비롯해 이달까지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의 처리건수는 8천여건에 이른다. 특히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범에게는 누군가가 ‘건축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누군가의 돈을 거짓으로 속여서 훔쳤다면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할 텐데, 어쩐 일인지 이들에게는 ‘왕’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지하에 잠들어있는 전세계 왕들이 통탄할 일이다. 자신들이 ‘사기꾼’과 동일선상에 놓였기 때문이다.
‘순살아파트’라는 용어는 더욱 가혹하다.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 이후 ‘순살아파트’라는 단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전국의 아파트가 국민들의 의식속에서 흐물거리고 있는 지경이다. 엄밀히 따지면 인천 검단아파트 문제는 아파트 자체가 무너진 게 아니라 ‘지하주차장’이 붕괴된 것이다. 발가락에 문제가 생겨 피가 난다면 일단 그 부위를 국소적으로 치료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지금은 발가락 부상을 당한 사람을 대형병원 응급실에 입원시켜놓고선 온갖 검사를 해야 한다며 논의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순살’이라는 단어가 한몫하고 있다.
‘건축왕’과 ‘순살아파트’라는 용어를 보면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프레임을 생각하게 된다. 건설산업이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말라고 말하는 순간 듣는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리는 아이러니를 지금의 건설산업에서 목격하고 있다. 결국 기자도 지금 이 프레임에 갇힌 셈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 따르면,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과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은 곧 사회 변화를 의미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공적 담론의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게 된다. 언어가 프레임을 활성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프레임은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먼저 ‘순살아파트’와 ‘건축왕’이라는 단어를 겁도 없이 갖다붙였나. 그런 용어를 비판없이 무분별하게 퍼 나른 이들도 반성해야 한다. 지금의 건설산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축왕’과 ‘순살아파트’라는 용어부터 사라져야 할 판이다. 건설인들에게 ‘건축왕’과 ‘순살아파트’는 너무 가혹하다.
/윤경찬 편집국장 <저작권자 ⓒ 매일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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