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73話’

기록에서 찾아본 철도역사 3

매일건설신문 | 기사입력 2021/07/29 [16:49]

[기획칼럼]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73話’

기록에서 찾아본 철도역사 3

매일건설신문 | 입력 : 2021/07/29 [16:49]

▲ 공사 중인 한강철교와 나룻배               © 매일건설신문

 

오늘은 경인철도는 ‘왜? 인천~서울 간이 아닌 인천~노량진 간으로 운행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원인인 한강철교 이야기를 역사기록에서 찾아본다.

 

1896년 3월 29일 ‘경인철도허가서’에 의하면 12개월 내 즉, 1897년 3월 28일 이전에 회사를 조직하여 착공해야 하며, 한강의 교량은 보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설치해야 하고, 착공일로부터 3년 이내에 완공이라는 조건은 1900년 3월 28일까지는 완공해야 했으며, 전쟁 또는 기타 사유에 의하여 공사를 못 하게 되는 경우에는 연장을 승인할 수 있다 하였고, 완공 후 15년 후에 감정가격에 의하여 조선 정부가 구매할 것이지만 15년의 만기에 구매하지 못하는 경우 특허권을 10년씩 연장한다는 조건이 기록되었다.

 

최초의 부설 허가 기간을 지킬 수 없게 한 한강철교의 부설 자재는 1898년 1월 29일 자 뉴욕 ‘Harper’s Weekly’에 의하면 최초 부설권자인 James R. Morse가 미국에서 발송하였으며, 부설공사는 Morse에 의하여 한강의 양쪽 축대와 중간 교각까지 축조한 후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부설권을 일본회사에 양도함에 따라 일본회사는 Morse가 구축한 양쪽 축대는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중간에 설치한 교각은 불량공사라는 이유로 철거하였다고 하는데, 필자는 교량 옆 보도 설치를 생략했을 때 설치할 교각의 규격과 맞지 않아 철거하였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량 옆 보도 설치를 취소함에 따라 한강은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인도교인 한강대교가 개통된 1917년 10월에야 한강을 자유롭게 건널 수 있었다. 압록강은 이보다 앞선 1911년 10월 철교와 함께 보도가 설치되어 편리하게 이용한 사실로 보아 철교 옆 보도가 위험 요소는 아닌데 일본이 경인철도 부설공사를 인수한 후 최초 허가서에 명시된 보도 설치를 제외한 명확한 사유가 기록된 자료는 찾지 못했다.

 

1899년 1월 9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권에 주한일본공사가 ‘지난 2일 한국정부와 미국공사가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를 승인한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부설권 이전이 이때야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철도회사는 1899년 7월 한강 홍수로 인하여 부설공사 중인 철교 자재가 유실되는 등으로 공사 기간을 6개월 연장 요청한 것에 대하여 민종묵 의정부찬정이 박제순 외부대신에게 6개월 연장이 타당하다는 보고서(23호)에서 1900년 9월 28일까지 대한제국 정부의 연장승인이 있었음을 확인된다. 

 

1899년 9월 한강철교를 제외한 인천~노량진 간 철도부설이 완공됨에 따라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 가(假) 개통식에 이어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한강철교는 다음 해 7월 5일 준공되어 7월 8일부터 경성~인천 간 전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한강의 교량은 계속 증설되어 지금은 30개의 교량이 사용되고 있으며, 한강철교를 비롯하여 동작대교, 잠실철교, 당산철교, 마곡대교 등 5개의 교량에는 고속 및 일반철도와 전철 등이 운행되고 있다.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는 ‘제74화’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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