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제3話>“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으로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일본”편집자 주(註): 본지는 철도가 지닌 특별한 역사(歷史)성 즉 이 나라가 조선 말 겪은 격변의 시대를 단순히 교통 운송 수단이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숨결 같은 존재이기에, 또 철도史가 잘못 알려진 보편적 오류들이 한국사 안에서도 많아 철도교통문화협회 명예회장인 손길신 前 코레일 철도박물관장을 통해 바로잡고자 연속해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미국 투자자들의 비협조로 자금조달에 실패한 J R. Morse는 일본 경인철도인수조합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7년 5월 Morse 책임 하에 18개월 내 철도운행이 가능한 상태까지 공사를 완료하여 인수조합에 양도한다는 경인철도양수계약서를 작성하고 기탁금 5만불을 받고, 일본인(구주철도 사장 仙石貢)을 감독기사장으로 위촉했다.
이후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공사자금 조달에 실패한 Morse는 기탁금을 30만불로 인상해주지 않으면 기탁금을 반환하고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하자 일본은 영국 또는 불란서가 매수할 것을 우려하여 요코하마은행(橫濱正金銀行) 100만원 융자를 알선하여 공사를 계속 진행하였다.
이러한 Morse의 어려움을 알아채지 못한 미국은 1898년 1월29일자 뉴욕주간지 "Harper's Weekly"에서 정치적으로는 취약하지만 동양의 아름다운나라 조선에 우리 미국인이 철도를 부설하고 있으며, 역사 설계는 미국 본사에서 담당했고, 증기기관차, 레일, 한강철교 건설자재 등은 이미 수송이 완료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주말이면 이미 부설된 선로를 이용하여 운행되고 있는 수압식 인차철도(人車鐵道 : 사람이 밀고 가는 철도)로 관광에 나선 미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줬다.
또, 일당 35센트를 받는 공사인부들이 만족해 한다는 보도내용을 통해 경인철도 부설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일본은 Morse를 완전히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경인철도부설권 확보가 목표인 만큼 공사 중 사사건건 일본인 감독은 잦은 의견충돌을 일으켜 Morse가 끝내는 경인철도 부설공사를 포기하고 1898년10월 경인철도인수조합의 매매계약 작성에 동의케 함으로서 1899년 1월31일 경인철도부설권을 넘겨받았다.
이때는 필요한 자재는 이미 확보되었으며, 토목공사는 50%이상 완료되었고, 한강철교 부설공사는 양끝 교대와 중간 1개의 교각을 설치한 상태였으며, 공사를 인계받은 일본은 양끝 교대는 그대로 사용하고 중간 교각 1개는 불량 축조라며 철거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허가조건인 통행용 보도 설치를 위해 설계된 교각이 보도를 생략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아 철거한 것이었다는 추정을 해본다. Morse의 자금조달 실패를 이용하여 부설권을 획득한 일본은 1899년 4월23일 인천역에서 경인철도기공식을 또다시 거행하였다.
이에 필자는 왜 Morse가 공사자금 조달에 실패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철도박물관장 재직 중 매년 외국어대 특강을 위해 방한 할 때마다 방문하는 워싱턴 Whitworth대학 Norman Thorpe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한바 다음해 방문 시 그가 알아온 대답은 당시 일본은 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막기 위하여 한국에 곧 전쟁이 발발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투자자들이 투자를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그 증거로 당시의 한미외교문서(Korean American Relation, Documents Pertaining of Far Eastern Diplomacy of the United States, Volume Ⅲ, 1896-1905)사본을 구해 주었다.
일부 역사기록에 “미국인 부로카 Morse가 돈을 벌기위해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하여 일본에 팔았다”는 내용은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역사의 왜곡임을 알 수 있었다.
☞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4話」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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