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측량의 기원
측량기술은 역사상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데 그 역사는 오래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 강이 범람했을 때 농장의 경계가 사라지고 말았는데 이 경계를 ‘로프 스트레츠’(rope stretcher: 로프를 당겨 경계를 설정하는 측량기사), 또는 측량사들이 간단한 기하학을 이용해 다시 설치했다. 또한 거의 완벽한 정사각형으로 Great Pyramid of Giza(El Giza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트)가 BC2700에 건설됐다. ◈ 우리나라 측량사 우리나라의 측량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발견할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 보고했다. 고려 말 조정에선 각도에 양전사(量田使)를 파견해 토전을 개량(改量)하는 작업에 착수하고(1388년 8월),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이 설치되는 등(1388년 10월) 기본적인 개혁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과전법 제정이 정식으로 선포된 것은 1391년(공양왕 3) 5월의 일이지만, 그 전해인 1390년 9월엔 새로운 전적(田籍)의 작성 작업이 일단 마무리를 짓게 돼 공사의 구전적은 시가에서 불태워 없애버렸다.는 역사기록에서 양전사가 등장하고 이들은 국가의 중요한 요인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 양전사의 활동은 과전법의 실시로 중대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고 이때 측량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구는 세종23년(1441년)에 등장하는데 중국 후송(1027년)의 것을 보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리고차는 정밀도가 요구되는 각종 지도제작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종 2년의 '황극치평도', 세조9년의 '동국지도(사진-10)' 등에 이 기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세종 조에는 '간의'를 사용해 위도 1도를 정확히 계산했다. 세종 때 측정한 두 위도(지점)간의 거리를 환상하면 108km로 현대의 110km로 거의 일치하는 정밀도를 가진다. 경국대전(1469년)에 도로의 폭과 도로, 교량, 구거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이 규정에 맞게 시설을 하게했고, 일정한 거리마다 표식을 세워 행인들이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 다양한 측량기법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 폭은 가로 80리, 세로 120리 간격의 동일한 크기로 접혀 있으며, 위와 아래를 모두 연결하면 동서 약 3m, 남북 약 7m의 초대형 朝鮮全圖가 될 수 있다. 거리와 방향, 위치의 정확성을 추구한 조선시대의 全圖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조선 지도집은 1834년(순조34)에 남북 29폭(또는 층)으로 나누고, 2책으로 묶은 '靑丘圖'로 알려져 있다). 근대적 측량은 일본이 중국대륙 진출을 목적으로 1:2,000,000을 제작해 청·일 전쟁(1894~1895)에 대비했다. 이후 일본은 측량반을 운영해 3개월 후 1:50.000지도를 완성했으나 정확성은 없는 지도였다. 1900년까지 일본 기술자를 중심으로 1:200,00지도가 완성됐다. 1937년 일본은 각 지방도를 1:10,000, 또는 1:15,000의 축척으로 제작했다. 다음 지도는 경성시가지 계획평면도이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근대적 토지조사가 시작됐다. 1910~1917년 사이 7년간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이 시작됐는데 측량의 시작은 일본의 대마도에 있는 삼각점을 이용해 한국의 절영도와 거제도에 삼각점을 설치하고 이를 기준으로 북으로 삼각망(그림-1)을 구성해 나간 것이 근대적 측량의 시발로 본다. 이 때 사용된 트란시트와 수준위가 지도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김혜현 기자 <저작권자 ⓒ 매일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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