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개항된 군산시는 호남 곡창지대 쌀을 반출할 목적으로 일찍 개발된 도시로 일본인들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여 1926년12월말 시 인구 34%를 초과한 8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베에노쿤산(米の群山)’ 즉 ‘쌀의 군산’이라 했다.
1950년대 중반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망하던 당시 중립국감시위원단 중 공산국 편에 기울었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랜드는 철수하라는 데모에 참여하는 시민과 학생들을 군산에서 옥구의 미군 비행장 앞까지 대용객차와 화차로 편성된 열차편으로 수송하였으며,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도 무개화차에 승차하여 비행장 앞에 내려 “체코앤드 폴리스 게라웨이(get away)!“를 외친 기억이 있다.
휴전 직후 객차도 부족하여 화차에 창문을 달고 나무의자를 설치한 대용객차로 편성된 열차가 대부분이었으며 통근열차는 여학생과 남학생 칸이 따로 있었지만 옆 칸으로 이동하는 통로는 없었다. 때문에 필자는 어느 날 늦게 뛰어와 막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 하고보니 여학생 칸이었으며 남학생 칸으로 옮겨 탈 수 있는 다음 역까지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에 시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이야기는 1977년11월11일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 가옥 파괴로 인한 1,647세대 7,800여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이리역 화약적재 화차 폭발사고 발생시간에 바로 옆 선로에 도착했어야 했던 군산선 여객열차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은 당시 임피역을 정시 출발한 기관사가 운전허가증인 통표를 받아오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 통표 분실 시 열차를 세우고 찾아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도중에서 후진하여 통표를 받아오느라 열차가 지연된 것이며, 기관사의 실수로 인한 열차 지연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방지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당시 지방철도청장에게서 전해 들었다.
10여 년 전 가천박물관 방문 중 설립자 가천문화재단 이사장님이 1940년대 여고시절 지경역에서 친구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고향이 군산선 지경역 근처였음을 알았다. 군산선은 2007년12월28일 신 장항역과 신 군산역 간의 금강을 건너는 철도연결공사가 준공되어 천안~장항 간 장항선이 천안~장항~군산~대야~익산으로 연장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장항선이 개통됨에 따라 2007년12월31일을 마지막으로 군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P.S) 33화 중 “경성역이 1905년 서대문역으로 변경 시 영문도 ‘West-Gate Station’으로 변경되었을 텐데 라는 독자 질문에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1906년부터 한국을 방문 서대문역 근처 호텔에 머물며 참고한 열차시각표를 근거로 영문표기는 그대로 ‘Seoul Station’이었다는 대답을 드립니다.
▶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35話」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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